1.5 축구 전술 발전사 Digest



  축구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선 상당히 오래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에피스쿠로스'(episkuros) 또는 '하르파스톤'(harpaston)이라는 운동이 있었는데, 발과 손을 사용하여 상대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선을 넘기면 득점이 되는 단체 운동이였죠. 그리고 하르파스톤은 로마 시대로 이어져, '하르파스툼'(harpastum)이라는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유럽 전역에 걸쳐 식민지를 거느렸던 로마였기에 하르파스툼 역시 유럽 전역에 전파되게 됩니다. 다만 이때는 손의 사용이 가능해, 지금의 럭비나 미식축구 같은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하르파스톤.jpg 

<고대 그리스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르파스톤의 모습.> 어머 남사스러워라

 

하르파스툼.jpg 하르파스툼2.jpg 

<군사 국가였던 로마는 시민들이 직접 군단(Legion)을 이루어 싸웠다그래서 조직적인 움직임이 많이 요구되었고단체 운동이 하르파스툼도 이를 위해 로마 군인들도 즐겨하였다왼쪽은 일러스트오른쪽은 현재 이탈리아에서 전통 놀이로 행해지는 하르파스툼의 사진.>


일러스트 출처 : http://www.behance.net/gallery/Roman-Florence-Views-Unthinkable/9498495

 


  로마가 브리튼 섬(현재의 영국)을 침공하여 식민지로 복속시키면서 하르파스툼이 영국에 보급되었고, 영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도 전파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하르파스툼은 여러 형태로 바뀌면서 유럽 전역에서 계속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축구와 비슷한 운동들은 이탈리아의 칼초(Calcio), 유럽 각지에선 멜레(mêlée) 또는 멜라이(mellay)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곤 하였습니다. 영국에선 217년 로마 군대를 쫓아낸 것을 기념하여 12세기 오순절 화요일에 축구를 했다고 합니다. 혹은 15세기 영국을 점령했던 바이킹 족을 무찌른 것을 기념, 영국인들이 바이킹 병사의 두개골(!)을 차고 놀았다는 유래도 있습니다. 그만큼 축구는 축구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발전하기보단, 다양하게 각지에서 발을 사용하는 운동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었죠. 다만 손의 사용을 허가 여부와 인원 제한 등이 각지마다 달랐다고 합니다.

 

김춘추.jpg 

<태종 무열왕 김춘추도 김유신과 축국을 하다가 문명왕후 문희를 만나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권에서도 공을 발로 차는 운동이 옛날부터 행해졌다 볼 수 있었다. 사진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김춘추.>

 

  우리나라에선 과거 신라 시대에 돼지 오줌보를 차고 놀았던 축국(蹴鞠)이라는 운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축국이란 명칭을 사용하거나, 비슷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김유신이 같이 축국을 하던 김춘추의 옷고름을 잡더니 냅다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과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여동생 문희가 꿰매게 해주었죠. 이때 김춘추는 문희에게 반하고, 나중에 결혼하여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 문희는 문명왕후가 된 일화도 있습니다. 이 일화를 보면 공을 발로 차는 운동이 아시아 지역에서도 오래 전부터 행해졌다고 볼 수 있죠.

(이 이야기는 언니 보희가 산에 올라가 볼 일을 보았는데, 서라벌이 오줌에 잠겨버린 꿈을 꾸었는데 문희가 이 꿈을 사 왕후가 되었단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각 지역마다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서로 규칙부터가 달랐습니다. 공통적인 규칙이 통일된 현대 축구가 처음 정립된 것은 1863년 잉글랜드에서였습니다. 당시 축구는 잉글랜드 내 학교에서도 대표적인 체육 활동이었고, 노동자들의 흔한 운동 경기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결성한 클럽들끼리의 경기도 많았죠.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클럽들이 노동자들의 축구 클럽에서 출발한 사례가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학교나 클럽마다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한 충돌도 잦았습니다. 그래서 1848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최초의 축구 규칙인 케임브리지 룰(Cambridge Rules)을 만들어냅니다. 오프사이드 룰이나 손의 사용 금지 등을 규정하였지만, 그 주체가 케임브리지 대학이었기에 널리 쓰이는데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권위 있는 기관에 대한 필요성이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베니저 콥 몰리.jpg  축구의 규칙.jpg

<최초의 축구 협회 설립에 나섰고, 1863 <축구의 규칙>을 펴내며 현대 축구의 효시를 쏜 에베니저 콥 몰리. 그는 현재도 잉글랜드에서 축구의 아버지라 추앙받고 있다. 그 옆의 서적이 바로 <축구의 규칙>이다.>

 

  권위 있는 기관에서 통일된 규칙을 제정할 필요가 있었고,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셔(Yorkshire) 주 헐(Hull)에서 법무관을 지내던 에베니저 콥 몰리(Ebenezer Cobb Morley)가 축구 협회 설립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5번의 회의를 통해 1863 <축구의 규칙> (The Rules of Association Football) 이 발간되었습니다. 경기장 규격 제정, 여러 용어의 정의 등을 기술한 책이었죠. 파울이나 여러 분야에 대한 제정은 부족했지만, <축구의 규칙>을 토대로 하여 현대 축구가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설립된 곳이 현재의 잉글랜드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 FA)입니다. 잉글랜드 국가 대표팀 유니폼에 있는 삼사자 문양이 바로 잉글랜드 FA의 상징이죠.

 

  더불어 손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따라 축구와 럭비가 나뉜 시기도 이때였습니다.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설립되면서 축구에서 손 사용을 금지하였는데, 손을 쓰는데 찬성한 클럽들이 모여서 지금의 럭비로 발전시킨 것이었죠. 따라서 둘 다 영어로 football에 해당되지만, 축구는 association football, 럭비는 rugby football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었죠. 하지만 현재 축구는 football, 럭비는 rugby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축구를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인 soccerassociation football의 약자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football은 주로 유럽권, soccer는 주로 북미권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잉글랜드 FA 로고.gif

<잉글랜드 왕가의 상징인 사자 3마리를 반영한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엠블럼. 위의 The FA는 최초의 축구협회(FA)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엠블럼으로 인해 잉글랜드 대표팀은 삼사자 군단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축구 협회 설립과 동시에 현대 축구가 정립되었고, 현대 축구의 시작을 잉글랜드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에베니저 콥 몰리 또한 축구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여담을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언론에선 그동안 잉글랜드 대표팀을 축구 종가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유럽 현지에선 잉글랜드 FA의 상징을 본 뜬 삼사자 군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우리나라 언론도 삼사자 군단이란 명칭을 쓰고 있죠.

 

  당시 잉글랜드가 속해있던 대영 제국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죠. 우리가 제국주의 시기로 잘 알고 있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있었죠. 그래서 대영 제국을 가리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였죠. 이러한 영국의 전 세계적인 영향력에 힘입어, <축구의 규칙>에 따른 축구 또한 전 세계적으로 퍼질 수 있었죠. 현재 축구 강국들이 모여 있는 남미 대륙도 이 시절 영국 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을 통해 축구를 전파 받게 되었습니다.

 

1901년 강화학당 축구.jpg 조선체육구락부.gif 

<본래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클럽으로 최근 재발견된 1901년의 강화학당 축구부. 이전까지는 1902년 배재학당 축구부가 최초로 알려져 있었다. 그 옆은 1906년 대한체육구락부의 사진.>

 

  우리나라 역시 외국 열강들에 시달리던 이 시기, 축구를 전파받게 됩니다. 1882(고종 19) 영국 플라잉호스 호가 처음으로 조선에 정박하게 되면서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85(고종 22)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하던 영국은 함대 하나를 보내 조선의 영토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게 합니다. 영국 함대가 점령한 2년 동안 여러 문물이 전파되는데, 이 중에 축구도 있었죠. 1905년 최초 공개 경기로 알려진 황성기독청년회와 대한체육구락부의 경기가 열리면서 일제 강점기에도 축구는 조선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축구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에 맞춰 축구 전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현재의 축구 전술들이 정착되었습니다. 앞으로 설명해 드릴 축구 전술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축구 전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축구 전술의 최초의 개념, 포메이션의 탄생 피라미드 시스템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의해 정립되기 시작한 축구 규칙은 선수 수를 11명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골키퍼 1명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전술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선수 배치와 진형을 의미하는 포메이션(formation)이죠. 그리고 이 포메이션을 활용하는 구체적인 전술이나 활용법, 쉽게 얘기해서 팀의 스타일을 시스템(system)이라고 합니다.


  즉 4-4-2와 같은 진형은 포메이션이고, 티키타카닥공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죠.

 

피라미드 시스템.jpg 

<최초의 포메이션이라 일컬어지는 피라미드 시스템. 지금의 시각으로 봐서는 공수 균형이 붕괴하는 상당히 무모한 포메이션이다.>

 

  여하튼 여러 가지 전술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피라미드 시스템(Pyramid System)이 주류로 정착되게 됩니다. 2-3-5의 형태를 지닌 피라미드 시스템은 지금 보기엔 괴랄 하기(?) 짝이 없습니다. 골을 넣으면 이긴다는 기본적인 원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었죠. 공격 전술의 발전이 수비 전술보다 선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 사례죠.


  그리고 구체적인 빌드업의 개념 없이, 공격수들의 능력에 의존하는 전술이기도 하였습니다. 부분 전술과 같은 구체적인 전술의 발전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였죠.

 

  이 피라미드 시스템은 막강한 공격력에 기반을 둔 전술이었고주류 전술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격수 5명을 투입하는 만큼 공수 불균형이 심했고,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약팀들엔 어울리지 않았죠. 그래서 피라미드 시스템과 다른 유형의 전술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2) 공수 균형을 맞추어라 메토도 시스템, WM 시스템과 베로우어 시스템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863년 잉글랜드 축구 협회가 생기기 전에도 규칙의 통일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1848케임브리지 룰(Cambridge Rules)입니다.

 

  오프사이드에 관해 규정했던 케임브리지 룰에 따르자면, 골대와 볼을 받는 사이 선수 A 사이에 3명 이상의 선수가 있어야 A가 있어야 패스할 수 있었습니다. 3명보다 적은 선수들이 있는데 패스하면 오프사이드가 선언된 것이죠. 따라서 2명의 수비수(풀백)만 둔 피라미드 시스템이 효과적일 수 있었죠.

 

  하지만 케임브리지 룰로 인하여 공격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상대 수비가 1~2명만 있다면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불가능했죠. 더구나 수비수를 2명만 둔 피라미드 시스템이 유행이었던 점도 이 문제를 심화시켰습니다. 효과적인 공격의 불가능은 적은 득점을 양산했고, 골이 터지지 않는 경기가 많아지게 됩니다. 득점이 나오질 않으니 자연스레 축구가 재미없어지게 되었죠.

 

  그래서 1925년 오프사이드 룰이 개정됩니다. 3명이었던 수비수 제한을 2명으로 낮추게 되면서, 능동적인 공격이 가능해진 것이죠. 따라서 수비수 2명만 둔 피라미드 시스템은 5명까지 공격을 투입하는 전술에 무너지기 시작했죠. 그 결과 지도자들은 수비 숫자를 늘리게 되면서 수비 전술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오프사이드 룰 개정으로 공수 균형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었죠.


 

메토도 시스템.jpg 

<비토리오 포쪼 감독이 고안해낸 메토도 시스템. 하프백 2명이 수비적으로 나와 공격력이 자칫 약해질 위험이 있었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엔 축구 천재 쥐세페 메아차가 있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이탈리아의 1934, 1938년 월드컵 2회 연속 우승을 이끈 비토리오 포쪼 감독이 창시한 메토도 시스템이었죠. 2-3-5 포메이션이란 점은 큰 차이가 없지만, 포쪼 감독은 하프백(현재의 중앙 미드필더 + 수비형 미드필더)의 위치를 조정하였죠.


  피라미드 시스템이 하프백 3명을 일렬로 세웠다면, 메토도 시스템은 하프백 2명을 조금 더 수비 위치로 내려 수비 균형을 맞춘 것이었죠. 또한, 최전방 센터 포워드의 옆에 서 있던 인사이드 포워드 2명을 뒤로 보내 앞서 있는 하프백에게서 공을 이어받기 쉽도록 하였습니다.

 

주세페 메아차.jpg 비토리오 포쪼.jpg 

<지독한 골초였고, 매사에 건방진 태도로 일관했지만 축구 재능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쥐세페 메아차. (왼쪽) 그는 인테르와 AC 밀란을 넘어서 이탈리아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의 재능을 활용할 줄 알았던 비토리오 포쪼 감독은 (오른쪽) 메토도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수비를 강화하여 피라미드 시스템보다 공격력이 약해질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탈리아엔 당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 쥐세페 메아차가 있었습니다. 최초의 판타지스타(Fantasistar)이자, 축구 천재였던 쥐세페 메아차(Giuseppe Meazza) 덕분에 이탈리아는 강력한 공격력 또한 가지고 있었었죠. 그 결과 이탈리아 대표팀은 메토도 시스템의 수비력, 메아차의 폭발적인 공격력을 앞세워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승하게 됩니다.

 

  그러나 메토도 시스템 역시 고정된 수비수(풀백) 2명이란 한계가 있었죠. 하프백들이 열심히 수비에 가담한다 하여도, 기본적인 수비 인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메토도 시스템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전술이 있었는데, 바로 잉글랜드의 허버트 채프만 감독의 WM 시스템입니다.

 

허버트 채프만.jpg  허버트 채프만 동상.jpg

<혁신적인 축구 전술 개혁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아스날이 명문 클럽의 반열에 들 수 있게 된 초석을 다진 허버트 채프만. 급성 폐렴으로 만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동상으로 남아 아스날 팬들의 존경을 여전히 받고 있다. 사진은 에미레이츠 스타디움(Emirates Stadium)의 허버트 채프만 동상.> @조용현

 

  런던 남동부 병기창 노동자들의 클럽에서 시작한 아스날(Arsenal FC) 1925년 부임한 허버트 채프만(Herbert Chapman)은 당시 잉글랜드에서 유행하던 W 포메이션을 3-2-5 형태의 WM 시스템으로 발전시킵니다.


WM 시스템.jpg

  이때 현재의 중앙 수비수(센터백)의 개념이 생겨났죠. 센터백으로 하여금 최전방 공격수(센터 포워드)를 막게 하고, 2명의 풀백을 좌우로 포진시켜 2명의 하프백과 함께 윙 포워드와 인사이드 포워드의 침투를 막게 하였죠. 공격 5, 수비 5명을 두어 메토도 시스템과 피라미드 시스템보다 뛰어난 공수 균형을 지닐 수 있었죠. WM 시스템이란 이름은 공격수 5명이 W 자로, 수비 진형이 M 자처럼 포진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WM 시스템으로 아스날은 1930년대 초 잉글랜드를 제패합니다. 1930 FA컵 우승, 1930/31, 1931/32 시즌 리그를 2연패하게 되죠. 하지만 1934년 초 그는 갑작스레 폐렴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WM 시스템은 월드컵까지 퍼져 세계 축구 주류로 자리 잡게 됩니다.


피라미드가 유행했을 때.jpg 

<WM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공격과 수비를 5명씩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그래서 축구 경기가 일대일 싸움으로 발전하면서 대인 방어의 개념이 자리 잡는 계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당시 축구 경기는 WM의 싸움 구도로 흘러갔죠. 공격수는 공격만, 수비수는 수비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때라 5명의 공격과 5명의 수비가 똑같이 배치되어 5:5 싸움을 벌였죠. 그래서 1명의 수비수가 1명의 공격수를 전담 마크하는 대인 방어 WM 시스템을 통해 수비 전술의 시초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대인 방어는 자신과 마주 보게 되는 선수만 방어하는 것입니다. 즉 누가 공을 가지고 있든 간에 자기 앞에 있는 선수에 대한 일대일 마크만 수행한 것이죠. (모 영화 대사를 인용하자면 '난 한 놈만 패.')

 

칼 라판.jpg 

<오스트리아 출신의 칼 라판 감독은 WM 시스템, 메토도 시스템 모두 약팀이 소화하기엔 힘이 들다고 보았다. 그래서 베로우어 시스템을 고안, 선수비 후역습 전술의 모태를 만들게 되었다.>

 

  반대로 수비 축구 역시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칼 라판 (Karl Rappan) 감독이 이끈 1930년대 스위스 대표팀은 베로우어 시스템을 들고 나왔습니다. 스위퍼 편에서도 언급했던 베로우어 시스템은 1-3-3-3 형태로, 최후방 수비수 베로우어를 두어 수비를 강화하였죠. 이 베로우어 시스템은 공격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약팀들에게 안성맞춤이었죠. 수비를 먼저 탄탄히 하고, 빠른 역습으로 한 방에 무너뜨리는 선수비 후역습 축구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베로우어 시스템.jpg

<칼 라판 감독이 만든 베로우어 시스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3명의 수비수 뒤에 있는 '베로우어'로 약팀에게 부족한 수비력을 채워줄 수 있는 포지션이다. 대신 공격 숫자가 적은 만큼 역습 위주로 공격을 풀 수 밖에 없었고, '선수비 후역습' 전술의 모태가 되었다.>


  칼 라판 감독은 스위스의 클럽 세르베테(Servette), 그라스호퍼(Grasshopper)를 이끌면서 베로우어 시스템을 선보였고, 그 결과 스위스 대표팀 감독에도 오르게 되었죠. 이후 베로우어 시스템은 약팀들에게 매력적인 전술로 퍼지게 되었고, 훗날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의 모태가 됩니다.

 

  오프사이드 룰 개정은 WM 시스템을 만들었고, WM 시스템은 피라미드, 메토도 시스템을 뛰어넘어 당대 축구 전술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인 방어에 기초한 WM 시스템이 1950년대까지 유행하게 되었죠. 베로우어 시스템 역시 대인 방어에 기초한 전술이었죠. 하지만 축구 전술의 흐름이 또다시 변하게 되니, 공격 전술이 다시 세계 축구 판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오랜만에 찾아왔음에도 분량이 짧다고 느끼시겠지만 다음 편부터 분량 쏟아지는지라(...) 부득이하게 분량 조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 ?
    최지은 2013.10.24 14:15

    너무나 훌륭합니다.

    어느 분야이던..
    미미한 첫걸음이 있어야 후일을 도모 할 수 있는 것 처럼.
    RED도 9년의 공백뒤에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힘든 발걸음 이지만,
    후일(조속한..), 이런날을 반추할 시기가 곧 도래하리라 믿고있습니다.

  • ?
    황인호 2013.10.24 19:14
    현 조기회나 동호회가 주로쓰는 베로우어ㅋㅋ
    요것도 문제는 공수간격이 넘벌어진다는...
    아님 울팀이 문젠가?ㅋㅋ
  • ?
    맹익재 2014.01.11 09:59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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